우리는?

현천호
2020-08-26

그가 선택한 것은 농업이었다

한국일보


 2020.08.21

우장춘 박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광복되어 자주독립을 이루었다.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으며 빛 광(光) 회복할 복(復), 광복의 기쁨을 맞이함과 동시에 한일 국교 단절과 

종자 단절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채소마저도 일본 종자가 지배하던 시절, 

정부는 식량난을 극복할 사람은 오직 우장춘 박사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그는 1935년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육종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50년 우 박사는 빈곤과 혼란으로 뒤덮인 대한민국 땅에 발을 디뎠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씨 없는 수박’ 하면 우장춘 박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 박사가 만든 재배방법이다. 

당시 신품종에 대해 믿음이 없었던 농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우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키워 시연해 보인 것이 

와전된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그가 개발한 다양한 신품종들이 농가에 보급되며 한국 농업은 자주 자립의 단계로 

성장했다. 김치의 나라 한국이지만,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맛있는 김치가 없었다. 

그는 얇고 힘없는 배추와 작고 퍽퍽한 무 대신, 지금 우리가 먹는 속이 꽉 차고 잎이 사각사각한 배추와 크고 

수확량이 많은 무를 만들었다. 

또 제주도 환경에 맞는 귤 재배기술을 개발하고, 바이러스 병에 강한 강원도 씨감자를 보급했다. 

그가 이 땅에 머물며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했고 한국 농업 발전의 토대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그러나 그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장교 우범선의 아들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에서는 역적의 아들,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불리며 학대와 설움 속에서 자랐다. 

그의 귀국이 추진될 당시에도 반대가 있었다. 

굳이 친일파의 아들을 데려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귀국 전 “나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한숨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일편단심은 언제나 한국에 농업을 연구하는 기관이 생겨, 내 목숨을 바쳐 일할 날이 올 것인가 함이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귀국 후, 한국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부르며 공식적인 자리 어디에서도 ‘조국’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한국 근대사 죄인 중 하나인 우범선의 아들이 한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어떤 마음과 결심으로 한국 땅을 밟았을까?

1959년 8월 7일, 병상에 누운 그에게 최고의 훈장인 문화포장이 수여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포장을 쥐고서 “조국이 나를 인정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차마 내뱉지 못했던 한국을 처음으로 ‘조국’이라고 불렀다. 3일 후 우장춘 박사는 그의 조국, 

대한민국 땅에 묻혔다.

그가 일한 9년 5개월 동안 그는 한국을 조국이라 부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선뜻 그의 헌신을 애국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일본과는 비할 수 없는 박봉과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 농업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지난 8월 10일은 우장춘 61주년 기일이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농업의 길이, 그가 이 땅에 있었더라면 함께하고 싶었을 길이 되길 꿈꾼다.

아픈 과거를 희망의 역사로 바꾼 우장춘 박사, 그에게 농업은 결국 애국이었다.

민승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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