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현천호
2019-11-14


영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고 한다.


제인 오스틴이 책에서 “편견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남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한다.”라고 전한다. 오만과 편견은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다.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표현의 방법만 다를 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꼭 배척해야 할 것이 오만과 편견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들은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최소의 선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공공의 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그 최소한의 경계를 넘어서면 국가가 정해 놓은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에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성장해 오면서 배웠다.


하지만 우리들의 사회는 흑백논리에 길들여져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은 적이라는 논리를 무의식중에 가진다.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모든 사고가 획일화 되어져야 한다면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IT 발달로 인한 시공간 체계의 혁신, Big data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치의 발견, 제4차 산업혁명까지 예견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정보의 부재와 계획되어진 일방의 조직들의 집단 패권주의를 꿈꾸면서 국가 권력을 이해당사자들의 전유물로 마구 휘두르며 복종과 굴종을 요구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정상적인 삶을 산 사람이 없다.

자기 한목숨 살겠다고 혼자 도망가서 국민들의 목숨과 안위는 저버리고 라디오 거짓방송을 내 보내면서 한강철교를 폭파하게 했던 자, 천황에게 충성혈서를 쓰고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던 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라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가리키고 키워 놓았더니 국민을 총칼로 도륙한 자,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진실들이 있지만 우리 대한민국에는 올바른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왜 정치라는 굴레에만 들어가면 인간성과 가치관이 변질되는지 의문스럽다.


이제는 “국민을 향하지 않으면 국민에 의해 망하고, 국민만 바라보면 국민과 함께 망한다.”라는 명언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정치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확인했다.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가장 보편적 가치와 원칙으로 회귀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영남에서는 빨간색이라고 하면 선거에서 무조건 당선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구당 공천권을 가진 자의 눈 안에 들기 위해 영혼도 소신도 없이 공천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책임정치를 운운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2년 정치권은 대선기간동안 후보자들의 공약으로 내놓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했지만 2014년 6.4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은 공천을 강행했었고 야당도 결과적으로 공천을 해,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현, 정치제도인 정당공천제의 기본취지는 책임정치이다. 과연 정치인들이 말하는 책임정치가 국민들이 신뢰를 받고 있는지 질문을 할 경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을까?


이름을 바꾼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초등학생들도 아는 불편한 진실을, 지금의 정치인들은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인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정치판에서는 상용어처럼 통하게 되었을까?


정치의 본질적 의미는 개인이나 집단 간 이해관계의 대립과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해결해 가는 행위, 부 또는 권력과 명예 등 사회적 희소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 역할을 개인이 수행할 수 없기에 선거를 통해 뽑아 권한을 위임하고 행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임기를 두어 제도적 선출을 하게 하므로, 한시적 임시직공무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공무원은 영어로 쓰면 public servant라 쓰여지고 직역을 하면 공공의 하인 또는 공공의 봉사자라고 해석된다. 이 대목에서 한 번이라도 우리가 주인이라고 느껴 본 국민이 있는지?


정치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소수인 일부 기득권층을 위해 정치적 공학의 잣대로 결정되어 행해졌음을 지나온 역사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정치의 수혜자가 일반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되는 순간 국민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관심을 거두어 버린다. 잘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살아가는 삶 속에 직접적인 영향을 당장은 받지 않기에 체념 또는 우리 부모의 삶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그렇게 시류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버린다.


권언유착은 어제와 오늘만의 일이 아니고 또한 정경유착 또한 그러하다.

언론이 사회의 전체적인 여론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론의 고유의 기능이 감시와 비판이라고 말하지만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언론은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감시와 비판보다는 그 정권의 입에 맞는 미화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자처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언론사들은 보수를 주장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역사적 사실들이 그 주장들을 반증한다. 굳이 지면을 빌어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인터넷과 SNS가 없을 시절에 정보의 습득이 어려운 지방에서 정치에 대해 아는 척이라도 하려면 최소한 “월간00, 월간00 정도는 읽어야 한마디쯤 할 수 있다”라고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일련의 사실들이 대한민국을 집단적인 편견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사 사주들을 살펴보면 족벌들이 전체지분의 최저 64%에서 최고 94%를 소유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 언론사들이 자신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정책이나 사회현상에 대해 언론의 기본적인 기능을 용인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감시자 역할을 했을까?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일부 기득권층과 일제시대 때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에 걸쳐 이해관계가 바탕이 된 혼맥으로 절대 배신할 수 없는 조직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있다.

어떠한 시대, 사회가 오더라도 서로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도록 때로는 정권의 나팔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을 하며 이익이 되는 방향성을 유지하며, 사회가 개혁이라는 기치를 걸고 집권을 하면 목숨을 걸고 비난한 이유는 개혁의 도미노가 자신들의 족벌체제에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자 연설 중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공식적 석상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다. 사회전반에 언론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노무현 대통령후보자 수락 연설문 내용 중 발췌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단 한 번도 바꾸지 못했다.

그것이 비록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들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


눈 감고, 귀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저에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던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 중 략 ---------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왜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는 통합의 기술이다. 민주주의는 분열과 투쟁으로 통합을 이루는 제도이다. 모순된 얘기에 묘미가 있다. 분열하지만 규칙에 따라 싸우고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에 분열로써 통합을 이루는 기술이다. 인권이 확대되는 과정이 진보라 표현된다.

민주주의는 여론이 지배하고 여론은 언론이 지배하고 언론은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이 지배하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가치의 위기에 처해 있다. 정치는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지만 시장은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 시장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가치의 위기가 발생하게 되어있다.


주권자가 똑똑해야 나라가 편안해진다. 지도자를 만들고 지도자를 이끌고 가는 시민.

판단력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판단력이 갖추려면 작은 지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지혜로 발전되어야 한다.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전략적 사고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물의 이치에 대한 사고를 통하여 자기가치를 뚜렷이 할 수 있고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읽고 전략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통찰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때때로 예언의 능력으로 나타나서 민족을 구원하기도 한다. 판단력의 가장 높은 수준은 예언자적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지도자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강한 소신과 신념을 가지는 확신형 인간이어야 한다. 타인의 위협, 타인에게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에 솟구쳐 나오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공정이다. 절제된 성품, 신뢰, 책임성,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넓은 우리에게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 따뜻한 사람은 분노가 있다.

이익과 대의가 있다면 가까이 보면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지만 멀리 보면 대의가 곧 이익이다.


< 노무현 대통령 참평포럼 강연록 중에서 발췌 >



편협된 가치를 전달하는 대표언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깨어 있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에 수없이 많음을 2016년 촛불집회로써 증명이 되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까지도 부정하는 당론을 채택하고 주장하는 정당이 이 대한민국에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국민들에 의해 항상 새로운 전환점을 가졌다.


일본 식민 지배에 맞선 1919년 3·1봉기, 미군정에 맞선 1946년 10월봉기, 민족 분단에 맞선 1948년 제주와 여순봉기, 이승만 독재에 맞선 1960년 봉기, 박정희 유신 체제에 맞선 1979년 부마봉기, 전두환 독재에 맞선 1980년 광주봉기, 1987년 6월봉기와 노동자대투쟁, 신자유주의에 맞선 1997년 총파업, 그리고 2008년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2016년 촛불집회를 통한 박근혜대통령 탄핵의 일련의 사건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주체가 모두 국민들이다.


광주봉기 진압에서 미국 정부는 전두환 군사 쿠데타 정권을 용인했으며, 이후 그의 정부를 안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보통 국가 안보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부의 불안정으로 미국 투자가들의 자본이 이탈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 한국의 민중봉기 - 조지 카치아피카스 - >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라 정의한다.

의식은 세뇌 당하지 않을 만큼 깨어 있어야 하고, 깨어 있으려면 올바른 정보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정보는 의지만 있다면 수 없이 많은 매체들을 통해 습득 가능한 시대에, 왜곡된 정보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판단력은 우리들 개개인의 몫일 수 밖에 없다.


혹자들은 대화 중 정치적이지 않을 때 '순수'하다고 말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정치인으로 당선되기도 한다. 정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의지도, 지식도, 경험도 없다. 하다못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다짐이나 욕심조차 없다. 그저 개인의 감정에 휘둘려 정치인의 길을 가려 한다.


지역사회에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보편적 행동방식은 삼삼오오 모임에서 사회단체 관변단체, 지연, 학연 등 상식적 모임에서 출발을 해서 정치적 소신이나 가치관의 정립없이 지역에서 선호하는 정당에 공천을 받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외면하려 하는 정치의 현실을 우리 국민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것이야 말로 유권자로서 알아야 할 정치의 실체일 것이다. 정치인을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그렇다면 유권자로서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자신과 모두를 위한 최선일 것인가. 그냥 막연히 믿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오로지 헌신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을. 그리고 기대한다, 그런 정치인이 나타나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기를. 유권자들이 쉽게 정치에 속고 마는 이유다.


국민에게 진정한 정의,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정치인의 의무라고도 한다.

황금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그들이 행사하는 권리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국민의 올바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조금 더 연장하고자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물음을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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